월: 2017 8월

정의는 이가적 문제인가 (2)

  • 지난 글에서

지난 글에서는 악셀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의 논쟁에 대해 소개하고 인정과 재분배라는 이원론적 정의 개념에 대해 소개했다. 호네트와 프레이저 모두 인정이 현대사회 투쟁의 핵심이라는데는 의견을 같이했으나 호네트의 경우 구시대의 재분배 문제는 모두 인정 개념으로 환원가능하다고 주장했고 프레이저는 환원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해 정의 개념의 두 축으로 인정과 재분배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가적 문제가 될 수 있는 대표적 사회문제로는 인종문제나 젠더 문제가 있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이런 문제는 성공한 흑인 은행가나 가난한 백인 노동자의 예시를 통해 잘 드러난다. 한 영역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역에서 여전히 차별받을 수 있다면 이는 정의가 일원론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층위에서 존재한다는 주장의 논거가 된다.

 

  • 인정투쟁

지난 글에서 논쟁의 과정에 대해 약간의 첨언을 한 바 있다. 호네트의 저작인 인정투쟁이 많은 관심을 받고, 프레이저가 이 개념을 이용해 자신의 이원론적 정의론을 설파함으로써 호네트와의 논쟁이 성립되었다. 즉,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인정투쟁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덧붙여,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호네트 서평에 간략한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추천한다.)

인정투쟁이란 현대 사회에서의 운동이 분배정의 실현에서 차이에 대한 인정으로 전환되어 온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정이란 무엇인가? 문화적 차원의 비판에 대항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무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인정 개념은 헤겔에 의해 정립되었고, 이를 발전시켜 끄집어낸 것이 호네트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인정으로 시작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보통 의식 이론으로 설명한다. 의식이론은 한 개체가 무엇을 인식하거나 의지한다면 필연적으로 이러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떤 의식을 가진 자립적인 개체가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정신적인 인정으로부터 존립하게 된다.

피히테에 이르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그에 따르면 개체란 ‘다른 이성본질과의 대면을 통해 규정된 이성본질’이기 때문에 개체가 자유롭게 작용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성본질로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헤겔은 그의 주인-노예 변증법을 통해 이를 명확히 하였다.

만일 적수를 파괴했을 때 타자를 죽여버린다면, 그는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다. 대신 그는 적수를 살려둔채로 인정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적수를 죽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적수를 변증법적으로 제압해야 한다. 상대의 의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살려둔채로 칭송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타자를 노예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타자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것은 인정을 수행하는 주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노예 관계에서 주인은 노예에 의해 인정받는다. 하지만 주인은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다. 주인은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상대로부터 인정받는데 이는 즐겁지 않은 일이다. 인정하지 않는 – 무시하는 – 상대에게 인정받는 것은 크게 의미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체의 초월은 자신이 인정하는 상대에게서 인정받을 때만 가능하다. 주체는 인정을 갈망하지만 그 인정을 그냥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주체는 특별한 상대에게 우아한 방식으로 인정받고자 하고, 그 인정만이 가치있는 것이 된다.

호네트의 인정투쟁이론은 이러한 헤겔의 인정이론에 조지 허버트 미드의 사회심리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미드는 타자를 보편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일반화된 타자’ 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의식이론에 따르면 어떤 자립적인 개체는 항상 인정을 필요로 하고, 구체적이지 않고 보편적인 사회를 타자로 인식할수도 있다. 이를 ‘일반화된 타자’로 본다. 개인이 일반화된 타자와 긍정적인 상호관계를 맺는다면 이는 인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호네트는 사회적 투쟁의 목표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 인정상태가 된다고 보았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상대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상대에게 인정받는 것은 의미가 없기에 필연적으로 상호 인정이 바람직하게 된다는 논의는 존엄성과 인격성에 대한 인정, 식민지 저항운동이나 여성운동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적수를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관점은 기존의 지배자들이 피지배층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논거가 되었다.

 

  • 인정과 재분배 사이

프레이저가 이러한 호네트의 인정이론에 동의하나, 인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재분배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음은 앞의 글에서 살핀 바 있다. 경제적 질서와 문화적 질서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있음을 반론으로 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논쟁의 핵심은 인정 논리가 재분배 논리와 결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피는 데에 있다.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차별은 여성에 대한 무시에서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젠더 중심의 경제구조에 기인한 것인가? 물론 프레이저는 이를 경제 구조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

경제적 차별은 무시를 근거로 일어나는가? 혹은 이 둘은 독자적으로 일어나는가? 많은 노동쟁의는 인간다운 노동을 그 기치로 하는 경우가 많다. 즉, 무시에서 벗어나 인정받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의 인정은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나는가? 많은 경우 노동 조건의 개선이다. 이 개선은 근무 환경 및 노동 시간과 임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인정의 주된 방식에 경제적 보상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이 둘이 하나로 묶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게 한다.

프레이저가 말하는 이원론적 작동방식이 사실 심층적 차원에서는 결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는 것이 정의가 이원론적인지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시가 경제적 불평등을 옹호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이들의 일반적인 결탁이다. 또한 경제적 불평등이 인정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일원론적 정의의 근거가 된다. 중요한 것은 프레이저 또한 이들이 자주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프레이저와 호네트 논쟁은 인정과 재분배 문제가 항상 함께 나타나는지, 때때로 그렇지 않은지 찾아내는데 그 핵심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인정-무시 일원론의 반례를 찾아내는 것과 이 반례에 대한 논파이다.

즉, 프레이저가 제시한 경제적으로 성공한 흑인의 택시잡기 문제, 혹은 백인 블루컬러 노동자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를 분석한 후, 이 글에서는 원래의 목표인 젠더 문제와 한국 사회에의 적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상대적으로 완화된 이가적 문제인 인종문제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현재 더 첨예한 대립 상황에 있는 젠더 문제를 살피는데 있어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간 논쟁의 결과는 현재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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