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eraofclarity

정의는 이가적(bivalent) 문제인가

  • 이 연작에 대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해당 주제의 연작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을 채우기 위해 비축분을 만들어서 가능하면 월,화요일에 올립니다. 저도 잘 모르는 주제이기 때문에 공부하며 씁니다. 저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도 아니며 순수히 개인적인 관심에 의해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이 글을 쓰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다만 저를 위한 글쓰기가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내용에 대한 지적 감사히 받겠습니다.

 

  • 무엇을 다루는가

주로  악셀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의 논쟁, 그리고 프레이저의 페미니즘 이론, 진보적 사회 해방운동에 대한 소고

 

1.

이가적(bivalent) 문제는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살펴보고 해결하는데 있어 좋은 시각을 제공해준다. 특히 인종이나 젠더 문제를 설명하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결국 이는 정의론(Justice)과 연결된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딜레마를 실증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현대 사회에서 정의라면 가장 먼저 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분배정의를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정치적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가 성장하며 다양성에 대한 인정욕구 또한 터져나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회적 갈등이 분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 섞여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갈등의 본질을 파악하기 힘들어지며 해결책을 제시하기란 더더욱 지난해진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논쟁에서는 이렇듯 섞여있는 문제를 잘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측면의 정의 논쟁을 이가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이 이가적인가? 낸시 프레이저에 따르면 재분배와 인정이다.

재분배(redistribution)란 경제적 층위에서 논쟁이 되는 갈등을 의미한다.

인정(recognition)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저임금 여성 노동의 예를 들어보자. 특히 출산 이후 여성을 중심으로 다수가 저임금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다.  이는 단지 재분배의 문제인가? 아니다. 성(gender)에 대한 왜곡된 문화적 편견이 이들 노동자들을 경제적 양극화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즉, 경제적 양극화는 인정문제를 매개로 현실화되었다.

인종문제 또한 좋은 예시가 된다. 흑인들이 아직까지도 저임금 직종에 많이 종사하는 이유로 여전히 존재하는 문화적 차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이주 노동자는 어떤가? 낮은 임금과 문화적 폐쇄성으로 인한 차별과 무시의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재분배와 인정 문제는 서로 독자적인 문제이지만 긴밀히 엮여있기도 하고, 단순히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원인과 상관 없이 이 둘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 원인에 대한 논쟁이 호네트-프레이저 논쟁의 중요지점이기도 하다)

이 재분배와 인정 문제를 서로 분리하여 보지 않으면 많은 오해가 나타날 수 있으며 사회적 해결책 또한 잘 작동하지 않을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 낸시 프레이저는 이 둘을 분리하여 두 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악셀 호네트는 무시와 불평등의 문제가 동시에 심화되고 있다는 프레이저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투쟁의 일원화된 관점으로도 분배와 인정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호네트와 프레이저의 주장에서 일치하는 부분은 오히려 나와 같은 한국의 비-해당분야 연구자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호네트와 프레이저는 모두 사회적 투쟁의 방향이 분배 투쟁에서 인정 투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여전히 재분배 투쟁이 중심이며 문화적 인정 투쟁은 변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시각과는 구별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인정투쟁은 퀴어 문제 정도가 보이고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분배 문제에 집중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네트가 인정 일원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분배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호네트는 현재의 전세계적 경제 양극화 상황에서 분배문제야말로 가장 심각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호네트가 분배문제를 무시한다는 오해는 호네트와 프레이저의 ‘인정’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둘의 시각 차를 살필 수 있는 핵심적인 주장과 맞닿아 있다.

호네트와 프레이저의 논쟁의 핵심적 문제는 인정으로 환원되지 않는 분배상의 불의가 존재하는가에 있다. 모든 분배상의 문제가 인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호네트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인정투쟁만으로도 재분배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정으로 환원되지 않는 재분배 문제가 함께 존재한다면 프레이저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재분배와 인정 모두를 사회 정의 투쟁의 두 축으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 유명한 호네트의 저작 ‘인정투쟁’이 먼저 등장했으며 프레이저의 이원론이 이후에 등장해 논쟁을 촉발시켰음을 상기하자. 논쟁의 진행과정 자체가 모호한 개념을 정립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도 있다.

 

 

3.

프레이저의 이원론적 관점은 사회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이원론이 아니라 관점적 이원론으로 볼 수 있다.

사회존재론적 차원이란 분배는 경제적 차원에 기인한 것이고 인정은 문화적 차원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 때 둘은 상호침투가 불가능하다. 관점적 이원론이란 분배와 인정을 단지 분석적 관점에서 상호환원불가능한 것으로 볼 뿐 경제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위에서 악셀 호네트가 주장한 분배의 인정으로의 환원가능성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불평등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인정을, 무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배를 사용할 수 있다. 이는 문제의 원인이 환원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서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해결책의 사용을 달리할 수 있다는 관점을 말한다.

프레이저의 인정 개념에서 나타나는 무시는 특정한 생활 방식과 정체성에 대한 문화적 지배와 불인정, 그리고 이에 대한 통속적 묘사, 비난, 비방 등의 현상을 의미한다. 즉,  이러한 무시 문제가 존재하는 것은 확정적인 사실이며, 이것만으로 분배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핵심 문제가 된다.

프레이저는 크게 3가지 차원에서 분배-인정 이원론을 정당화한다. 사회적 불의의 개념적 스펙트럼을 상상하는 사고실험, 분배-인정 이원론을 정의론적 차원에서 정당화하는 이차원적 정의론,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계급구조와 신분질서로 구별하는 사회이론이 이것이다.

 

분배-인정 이원론 스펙트럼을 살펴보자. 문성훈(2016)에 예시와 함께 잘 정리되어 있다. 프레이저의 스펙트럼의 한 쪽 끝에는 분배의 문제가, 다른 한 쪽에는 인정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이들 문제가 혼재된 문제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분배문제를 겪는 집단은 노동계급이다. 경제학을 공부한 내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프레이저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근본적으로 생산시설(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자본가들에게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 입장이며, 필연적으로 착취당하게 된다. 이 때 경제적 불평등이 나타난다. 물론 노동계급은 종종 열등한 계급으로 취급받기도 하며, 이는 문화적 불평등의 한 요소로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계에서의 무시는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기능한다. 그러므로 이 무시는 경제구조에서 파생된 이차적 요소로 판단할 수 있다. 노동계급에 대한 인정 문제는 분배 문제로 환원가능한 것이다. 즉, 이는 재분배 문제가 핵심이 된다.

반대편에서 인정의 문제가 본질적 요소를 이루는 문제는 동성애자들의 차별이다. 이성애 중심 가치 규범 하에서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종 혐오스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이 때문에 때때로 동성애자들은 경제적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이 인정받지 못하며 무시를 당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것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는 노동계급이나 자본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계급에 분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자가 겪는 사회적 불의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가치규범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 둘의 문제가 혼재되어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문제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인종이나 젠더 문제가 그렇다. “착취받는 계급의 특징과 멸시받는 성의 특징들이 결합된 혼성 형태가 존재”하며 이것이 젠더의 사례라는 것이 프레이저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여성은 흔히 경제적 영역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먼저 생산 노동에는 임금을 지불하고, 출산 및 가사노동에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구별 때문에, 그리고 임금노동 내부에서는  남성노동을 고임금, 전문직에 배치하고 여성노동을 저임금, 주변부 노동에 배치하는 노동구별 때문에 경제적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불이익은 경제적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남성중심의 문화 탓에 여성적인 것이 평가절하당하는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된다. 이 결과 여성은 사생활, 자율성, 자기방어, 평등에 대한 법적 이해나 정부정책, 직업 관행, 그리고 대중문화나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평가절하를 당하게 된다. 이것은 인정 영역의 문제이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두 가지 사회적 불의에 근거하여 여성은 경제적 차별과 문화적 무시라는 이중적 차별을 겪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구조와 남성중심주의적 문화가 둘 모두 철폐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인종 또한 마찬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때 둘 중 하나만 해결되었을 때 등장할 수 있는 문제를 고려해보자. 성공한 흑인 은행가는 분명 분배적 차원에서의 문제가 해결된 것 사례로 생각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지 못할 수 있다. 반면 백인 노동자는 문화적 인정 문제로 차별받지는 않지만 자본가에 의해 불합리한 해고를 당할 수도 있다. 두 이원론적 정의가 모두 해결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사회에 문제가 상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가적(bivalent) 문제이다.

 

 

 

Reference

낸시 프레이저 외, 케빈 올슨 엮음, 문현아 박건 이현재 옮김(2016),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낸시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과 논쟁들(Adding Insult to Injury), 그린비.

김원식(2009), 인정(Recognition)과 재분배(Redistribution), 사회와 철학 제 17호 2009.4.

이현재(2014), 여성 빈곤의 세 가지 측면: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빈곤-낸시 프레이저의 정의론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철학 제21권.

문성훈(2016), 프레이저 – 호네트 논쟁의 한계와 대안,  사회와 철학 제32 집 2016. 10.

 

 

 

 

단통법의 이유와 그 비판

정부가 단말기 보조금을 규제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초기에는 기존 사업자가 후발 사업자의 가입자 유치를 방해한다는 이른바 진입장벽으로서의 이유가 부각되었습니다만 최근 단통법에서는 이 점이 이슈가 아니죠.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용자 차별 금지입니다. 제일 많이 나오는 얘기죠. 같은 제품을 구매하는데 가격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서야 되겠느냐… 라는 주장입니다. 보통 단말기 보조금을 소모적인 마케팅 경쟁으로 봐서 사회적 낭비인 양 묘사하곤 하죠. 이런 맥락의 얘기입니다.

이 주장의 귀결은 이러한 보조금 구조가 시장을 혼란스럽게 하고, 소모적 비용 경쟁으로 인해 통신사로 하여금 서비스 경쟁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미래창조과학부의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 Q&A를 보면

‘이통사들이 소모적인 보조금 경쟁에서 벗어나 소비자 후생을 극대화하는 서비스 요금 경쟁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제정된 것’ 이라며 목적을 밝히고 있고, ‘단통법 시행을 통해 소모적인 보조금 중심 경쟁이 서비스/요금 등 본원적인 경쟁구조로’ 바뀔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비스 요금으로의 경쟁 유도가 두번째 규제 이유가 됩니다. 이 부분에서 정부는 단말기 보조금을 소모적인 광고와 같은 과도한 마케팅 비용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요약하자면 정부는 현재 단말기-통신서비스 시장에서
‘통신 요금에 비해 단말기 보조금이 지나치게 높으며, 정보 비대칭에 의한 가격 혼탁 및 부당한 이용자 차별에 따른 허탈감이 크다’

를 내세워 단통법을 시행한 것입니다. 물론 이에 따른 비판이 존재하는데요.

비판의 경우 많은 이슈를 다루다보니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요약하여 쓰면…

1. 보조금은 단순한 광고비가 아니라 통신서비스-단말기의 묶음(Bundling) 상품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는 광고처럼 허공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격할인으로 기능한다.

2. 애초에 과도한 보조금 차이가 왜 발생하였는가?
– 일반적으로 경쟁이 심화되면 가격은 평준화되어가는데 반대의 경향. 애초 정부의 규제 때문에 암시장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source:방송통신위원회 심의 의결 (제2013-46-207호) 7쪽.)

번호이동의 일별 편차가 매우 큰 것은 정부의 규제에 따른 ‘깜짝 할인’ 등이 있었던 반증이라 볼 수 있음.

3. 그렇다면 보조금을 줄이면 과연 요금이 줄어들 수 있는가?

1) 정말 보조금, 요금이 둘 다 높은 것이 문제가 되는가?
2) 만약 보조금, 요금이 둘 다 높은 것이 문제가 된다면 보조금을 제한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1) 의 경우, 간단한 모형을 설정합니다.
소비자의 유형(type) 을 단말기를 바꿀 확률이 높은 소비자와 낮은 소비자로 나누어 분석하면

높은 유형의 경우 요금, 보조금이 모두 높을 때 유리하고, 낮은 유형의 경우 요금, 보조금이 모두 낮을 때 유리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소비자의 유형에 따라 파악하는 것이지 무조건 요금과 보조금이 둘 다 낮다고 사회적 후생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부의 주장이 옳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한 가지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약정할인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휴대폰 변경하는 것을 토대로 실증 연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의 경우, 1)의 분석 결과 실제로 현재의 요금, 보조금 수준이 모두 사회적 최적 수준에 비해 높다고 가정할 때입니다.

먼저 모형의 인과를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 요금이 높아서 보조금이 높은 것인가? 반대로 보조금이 높아서 요금이 높은 것인가?

통신사는 단말기와 서비스를 묶어팔기 함에 있어 약정기간동안 충분한 서비스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전적으로 가입자 유치를 위해 높은 보조금을 기꺼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보조금이 높아서 요금이 높은 것이 아니라, 높은 요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보조금이 높아지는, 반대의 인과를 보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정부가 시행하는 단말기 보조금 제한이 실제 요금 인하로 이어질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요금, 보조금이 모두 높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정말 문제라면) 정부는 어떤 정책 수단을 통해 이를 규제해야 할까요?

요금, 보조금의 경우 요금이 보조금에 비해 더 경직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이는 계약기간의 존재로 인해 통신사간 암묵적 담합이 더 수월하며, 더욱 강한 차별금지를 갖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같은 요금제 사용) 그러므로 기존에도 정부의 경쟁제한적 조치가 있을 때 요금이 아닌 보조금이 움직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조금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요금을 제한하거나 요금 경쟁을 활성화하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또한, 정책의 이행 과정을 볼 때

요금 인하 -> 그럼에도 보조금 인하 X 의 결과가 나타난다면 소비자는 현재보다 이득을 보게 되고, 사업자는 손실을 보게 됩니다.
반대로 현재의 단통법과 같이 보조금 인하 -> 하지만 요금 인하 X 의 결과가 나타난다면 사업자가 이득을 보게 됩니다.

같은 결과를 목표로(요금/보조금 모두 인하) 하더라도 어떤 가격을 건드리느냐에 따라 규제자의 편향성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책이라는 재화에 대한 단상

오랜 기간 광고업계에 종사해 제일기획 부사장까지 지냈던 최인아 씨는 책방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고 있는데 이번에는 서점의 도서관화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특별히 새로운 주장은 없지만 ‘책방은 도서관이 아니다’ 라는 입장을 잘 나타낸 간결한 글이다.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주제인만큼 지겨운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도서정책에 대해서는 항상 여러 이견이 존재하는만큼 책이라는 재화 자체에 대해 한 번 살펴보자. 어떤 정책의 당위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화의 특징에 대해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책은 예로부터 마음의 양식, 지식의 보고 등으로 불리며 장려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져왔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긍정적 외부효과를 불러오는 재화라고 볼 수 있다. 의료백신 등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백신은 본인이 병에 걸리는 것도 막아주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백신이 보급된다면 백신을 접종받지 않은 사람도 병을 피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구매하는 개인이 얻는 효용 외에 부가적인 가치를 사회적으로 창출한다면 그것이 긍정적 외부효과이다.

책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책, 지식의 융성이 사회 전체적 인적 자본 축적에 기여한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공공도서관이 많이 존재하는 것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책이 가지는 긍정적 외부효과에 기인한다.

 

또 한 가지 고려할 특징은 책이 경험재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경험재는 탐색재와 함께 살펴보자. 탐색재는 구입 시 잠깐 살펴보는 것으로 가치를 알 수 있는 물건이다. 탐색에 걸리는 시간의 차이 및 정확도 등 경계는 다소 모호할 수 있으나 구입 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재는 구입하고 사용한 뒤에야 가치를 알 수 있는 물건이다. 주로 중고차나 1회성의 공연 등을 사례로 든다.

책은 둘의 사이에 있지만 경험재에 가깝지 않나싶다. 강연, 공연, 영화 등과 그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험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잠재적 구매자들에게 신호(signal)를 보낸다. 브랜드 가치나 명성,광고 등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비자들은 기업이 합리적이므로 신뢰를 잃고싶지 않다면 그간 쌓아온 브랜드 가치에 걸맞는, 쏟은 광고비에 걸맞는 제품을 내놓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물건을 구입하고 기업 또한 실제로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책과 가장 흡사한 영화/공연 등의 콘텐츠는 티저 영상이나 소개 팸플릿을 제작하거나 주연배우, 감독 등을 내세워 광고를 한다. 따라붙는 평론가들과 사전 시사회 방청자들의 평은 덤이다. 책보다 더 재화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수 밖에 없는 영화 및 공연 등의 콘텐츠가 이런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물론 책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상대적으로 영화나 공연에 비해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다. 또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의 수도 영화감독, 배우, 공연 기술자 등에 비해 무척 많다. 이렇듯 쉬운 제작 때문에 너무 많은 종류의 책이 존재하기 때문에 마케팅을 통한 차별화가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별도의 체험판을 제공하거나 부가적 정보를 만들어내기보다는 간단하게 넘겨봄으로써 확인하게 하는 전시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 조합의 결과는 어떤가? 책은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장려되어야 한다는 논지와 더불어 구매 이전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야 판매하기 쉽다는 논리가 결합되어 판매와 체험이 너무나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읽을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면 문화적 저변이 형성되어 책의 판매가 늘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나이브한 이야기이다. 직접적인 데이터상의 상관관계도 뒷받침되지 않거니와 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서 기회의 장려는 기업이 나서서 할 일이 아니다. 외부효과로 인한 시장실패는 정부가 교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이미 운영되고 있는 공공도서관에 대한 홍보 등으로 대체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대형 서점이 독서 기회를 장려하며 고통은 출판사에도 전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네 서점은 더욱 위축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야말로 생색은 대형서점이 내고 부담은 다른 쪽이 나눠 지는 형국이다.

 

책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현상은 단순히 책에 대한 탐색 기회를 높이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개별 개인의 책에 대한 선호가 떨어지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어떤 산업도 도서 산업과 같은 정책을 펴지 않는다. 탐색 및 체험 기회를 늘리는 것은 먼저 소비자의 필요에 따른 상품을 제작하고 이를 알리고자 할 때나 유효한 전략이다. 먼저 책은 도서관에서 보거나 콘텐츠 제작자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기 위해 구입해서 보아야 한다는 인식을 주어야 한다. 오히려 책에 대한 체험의 기회를 줄이고 전문가 서평이나 도서판 로튼토마토와 같은 유저 리뷰 사이트 등의 정보 제공 채널을 늘리는 편이 올바른 접근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도서 정가제 등 인센티브 구조를 외면한 탁상행정식 정책이 사라지고, 다양한 가격 정책과 e-book 등 새로운 유통 플랫폼의 활성화를 시도하게 해야 한다. 책의 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실물 책에 대한 체험 기회가 적기 때문이 아니다. 문자를 이미지와 영상이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재생 난이도가 높은 동영상마저도 온라인, 모바일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이다. 아무리 서점에서 책을 제공하더라도 항상 쥐고 있는 휴대폰보다 접근성이 높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잡지나 신문 등 구독 활자 매체들은 기존 인쇄매체와 인터넷판을 결합하여 판매하고 있다. 책을 구입할 때 e-book과 번들링한 버전을 선택할 수 있는 등 근본적인 제품의 특질 변화를 자유롭게 시도하게 해야 한다. 단순한 체험 기회의 증대로는 수요를 변화시킬 수 없음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서점이 살아야 출판사가 사는 것이 아니며, 출판사가 양질의 책을 만들어내야 유통상인 서점이 득을 보는 것이다. 휴대폰 제조사가 휴대폰을 잘 만들어야 유통 대리점들이 많은 수익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책은 반대로 되어 있다. 체험 기회를 주다가 대량의 리퍼폰을 제조사에 떠넘겨 부담을 주고 원가 절감 압력을 통해 질을 떨어뜨리는 상황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품질이 떨어진 책들조차 – 접힌 부분이 생기거나 약간의 손 때가 묻은 책들 – 할인판매할 수 없게 막아둔 도서정가제이다. 악성재고를 만들게 하고 덤핑조차 못하게 한다.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없는데 판촉행사만 많이 한다고 물건이 잘 팔릴 리가 없겠다.

대형서점의 역할이 줄어들고 저자, 출판사와 정부가 협력해야 한다. 책의 긍정적 외부효과에 주목해 도서관에 들어가는 책과 e-book에도 인센티브가 생기는 제도 등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만이 책이라는 재화의 본질에 역행하지 않고 독자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산업을 유지하는 방법일 것이다.

로봇은 세금을 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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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는 쿼츠와의 인터뷰에서 인간을 대체하는 로봇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세금을 냅니다. 기계는 세금을 내지 않죠. 그런데 로봇은 인간을 대체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기존의 기계와 달리 로봇(휴머노이드를 떠올려봅시다)들은 세금을 내는게 옳은 것 아닐까요?

게이츠의 주장은 정확히는 공장 자동화에 대해 세금을 물려 세원을 확보하고 그 재원을 이용해 사람이 좀 더 우월한 영역, 이를테면 노인이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이러한 세금을 물리게 되면 공장의 자동화는 늦춰지게 됩니다. 기업은 한계적으로 의사결정하고 세금을 내야 한다면 로봇의 가치는 작아질테니까요. 그리고 빌 게이츠는 이 ‘자동화 감속’에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득분배에 대해 이야기하며 기업이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정부가 나서야 함을 다시 한 번 역설하고 있습니다.

아마 게이츠의 주장은 불평등 문제나 산업구조의 변경으로 발생하는 많은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재원을 기존의 방법으로 마련하기 어려우므로 아직 이해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 파레토 효율의 개념을 연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 영역에서 재원을 마련하자는 현실적 문제와 결부되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잘 알려진 마술같은 개념적 트릭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게이츠의 원문 주장에 깔려있는 경제학적 근거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 시대 최고의 혁신을 이끈 기업가가 혁신의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말할 때는 비단 분배 목적의 구호뿐 아니라 나름의 통찰이 있을 것입니다.

Tyler Cowen은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외부효과라고 말합니다. 가장 먼저 고려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인간에 대한 돌봄이 증가하게 된다면 이는 낮은 기계대체율로 인한 비효율을 커버할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책이나 교육, 백신 서비스가 대표적입니다. 이들 긍정적 외부효과를 가진 재화들은 흔히 시장에서 사회 최적 수준으로 공급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나서 낮은 가격에 교육, 백신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로봇을 인간의 노동으로 대체하는 대신 천연자원 등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는 혁신만 늦추고 실제 긍정적인 고용효과나 일자리 창출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로봇에 세금을 매겨 혁신을 포기하는 대가로 기업이 추구하지 않는 국가 전체의 ‘인간의 행복’ 을 원했는데, 로봇에서 도피하여 다른 곳에 도착한다면 기업의 최적 선택만 방해한 꼴입니다.

결과는 로봇, 인간노동, 다른 대체 생산요소의 탄력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로봇에 대한 탄력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효과도 뛰어날 것입니다.

실증 결과는 어떨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기계의 생산성이 올라가고 대체되어왔음을 상기해야합니다. 결국 로봇은 필수적인 자본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로봇에 대한 수요 탄력성은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도 기계와 사무 자동화 기기는 수없이 등장해왔습니다. 로봇만이 특별취급 받아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모든 경제주체는 한계적으로 생산합니다. 오래동안 이어져온 노동-자본의 7:3 내지는 6:4 비율 생산 기여가 깨지게 될 때 부의 격차는 커지게 되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 과세 구조를 급격하게 변경하는 것은 생산 위축을 가져와 조세의 총 수입량 자체를 줄여버리는 ‘하향 평준화’를 낳을 수 있습니다.

외부효과에 대한 고민은 실증적(emprical)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로봇을 새로운 조세 영역으로 선제적 확보, ‘인간 특화형’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생산요소의 효율성 관점에서도 마찰적 실업의 기간을 줄여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동통신시장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정부가 기존에는 사용하지 않던 주파수를 천연자원으로 규정, 판매해 연간 수조 원의 세입을 확보한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여기까지 온다면 질문을 논의를 축약한 하나의 아이러니컬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봇은 인류 앞에 내려온 새로운[우리 모두가 누리는] 자원에 가까울까요? 아니면 기존의 노동을 대체하는 자본재에 불과할까요?

핵심은 의외로 철학적 문답이 아니라 로봇이 가지는 실증적인 노동 대체율일지도 모릅니다.

오바마 케어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 변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후 오바마 케어에 대한 지지가 역대 최고가 되었다는 NYTimes의 기사가 있다.

obamacare

그림에서 나타나듯 오바바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우려와 비판이 더 많았으나 역으로 트럼프를 선택한 후 오바마의 정책에 대한 평가가 올라간 모습이다.

기사에서 말하는 재미있는 점은 오바마 케어의 폐지가 확실시된 상황에서 이렇게 지지도가 반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최근 들어 오바마케어에 대한 보험료가 급격히 상승하고 시장경쟁이 약화되는 등 부정적인 기사들이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선호는 반대로 가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의 현명한 국민들이 드디어 진실을 깨달은 것인가?

물론 아니다. 그렇게 현명했더라면 아마 그들은 트럼프를 선택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진실은 John Cluverius 의 논문 에 나타난 주장에 가까워 보인다. 이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정부지출 대한 대중의 선호는 정권을 잡은 정당에 반대되는 경향을 지닌다. 어찌보면 이는 간단한 호텔링의 선형도시 모형의 직관과도 연결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그간 미국인들의 Obamacare 에 대한 낮은 지지는 Care 가 아닌 Obama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오바마가 떠나자 대중들은 남은 care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비로소 오바마케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것이고, 공화당은 이미 부자들이 보험료 납부에 대해 생각보다 덜 저항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트럼프의 광범위한 오바마케어 폐지 노력이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롭다. 배경이 부족한 내 개인의 짧은 생각에 따르면 곧 시작될 미국의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함께 엮여 한 파트로 살아남을 것 같다. 트럼프는 ‘오바마’를 지우는 것에 만족할지 케어 자체를 공격할지가 관전 포인트이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정책적 완성도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미웠지 지나보면 정책은 나쁘지 않았다는 말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권력 때문에  쉬쉬하다가 지나보면 모두 정책을 싫어하고 뒤엎는다. 최근 가장 공개적으로 정치 장에서 정책적 비판을 받았던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인데 퇴임 후 재평가된 정책은 특별히 없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KDI를 비롯한 정책연구기관의 능력은 높다고 생각한다. 정부관료의 능력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의 방향성 이전에 존재하는 미비함은 정당이 제대로된 정책연구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생각이 든다. 즉, 대통령 선거의 공약 단계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리더쉽과 카리스마도 중요하지만 정당의 역할이 커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4차산업혁명은 계속 사용될 용어인가

최근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여러 매체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비단 언론사뿐 아니라 유력한 대통령후보들마저 연설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으니 적어도 한국에서는 꽤나 자리잡은 용어로 보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기실 이 용어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잘 쓰이지 않으며 세계적으로는 더욱 생소한 용어이다. (독일 정도만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차산업혁명은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 의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이 밀고 있는 용어이다. 위의 링크에 가보면 현재 등장하는 각종 융복합 산업의 등장, 스마트 팩토리 등을 4차산업혁명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th-industrial-revolution

이렇듯 세계경제포럼은 증기기관과 기계 생산의 등장, 분업과 전기/대량생산, 전자/IT 분야의 등장을 이전까지 1,2,3세대 산업혁명으로 정의하고 현재 4세대 산업혁명이 등장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당 글은 2015년 9월에 나왔고, WEF에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지 1년이 조금 지난 셈이다. 아직 해당 용어가 많이 퍼지지는 않았다. 구글에 검색해보면 WEF와 클라우스 슈밥이 언급한 것만 줄창 나온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사이비 유행어인가?

일단 세계경제포럼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보자.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각종 보고서를 쓸 때 국가별 순위를 매기고 싶다면 이 곳의 자료를 안 볼 수가 없다. 각종 국가 경쟁력 지수는 대부분 여기서 만든다. 소위 ‘다보스 포럼’이 바로 이 세계경제포럼이다. 나름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어느정도 유명세와 함께 아젠다를 형성하는 권위는 가진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포럼의 회장인 클라우스 슈밥은? 클라우스 슈밥이라는 사람은 1938년생인데 1971년부터 세계경제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다. 33세에 창립해서 지금까지 계속 회장이다. 슈밥은 스위스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케네디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유럽의 국가들이 미국의 혁신을 따라잡자는 취지로 만든 단체가 세계경제포럼인데 벌써 50년이 다 되어간다. 슈밥은 제네바 대학교의 교수직도 맡아왔지만 딱히 다른 학문적 성과는 없고 세계경제포럼의 운영에 주력해왔다.

그래서 이번에 하나 밀어보려고 하는게 이 4차산업혁명인 것 같다. 사실 산업혁명이면 산업혁명이고 제 3의 물결이면 토플러의 물결이론이지 기존에 산업혁명의 차수를 딱히 나눠오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마 그래서 해외서도 큰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명 경제사학 블로그 중 하나인 Capitalism’s Cradle 에 따르면 이러한 산업혁명 분류는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대표적인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아래와 같다.

  1. 증기기관을 첫 번째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너무 좁게 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과 기계화를 함께 언급해 1세대를 구성한다면 세대를 보는데는 낫지만, 그렇다면 그 시작을 1784년으로 하는것보다 수십년을 당겨야 합니다.
  2. 산업혁명은 ‘발명’의 발명입니다. 그러므로 몇 가지 기술에만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분업과 같은 개념을 2기에 넣는 것은 애매합니다. 애덤 스미스도 1기의 시기에 분업을 언급했고, 포드 스타일 조립 라인이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은 맞지만 분업 개념은 몇몇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ies;GPT)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Anton Howes 는 산업혁명에 대해 두 가지 설명을 제안한다. 아예 이를 나누지 않고 지속되는 혁신으로 정의하거나, 좀 더 엄밀하게 범용기술에 의해서만 분류하자는 것이다. 굳이 범용 기술 묶음을 이용해 시기 분류를 하자면 이번 융합 혁명은 6차 혁명이라는 분류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현재 언론 해외에서도 별 반향이 없고(일례로 유명언론들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구글에서 4th industrial revolution으로 검색했을 때 단 하나 걸리는 이코노미스트의 2012년 기사에 따르면 오히려 지금 오는 변화가 3차 산업혁명이라고 주장한다), 학문적인 기반 또한 약해보이는 이 단어는 그냥 사라져버릴 것인가?

세계경제포럼에서 만든 4차산업혁명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의 좋아요 수는 수십 개에 불과하며 언론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슈밥이 경제학 박사 학위가 있어서 경제학자라고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기실 슈밥은 대학에서도 기업이론을 강의해왔고 세계경제포럼의 아젠다 설정 또한 경영학 영역에 걸쳐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애초에 세계경제포럼의 전신부터가 미국의 사례를 따라잡기 위한 유럽 경영인들의 모임인 ‘유럽경영포럼(European Management Forum)’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마케팅 학자인 필립 코틀러가 낸 최근 책 마켓 4.0이 죽어가는 4차 산업혁명 개념에 호흡기를 달아줄 것 같다. 마켓 4.0에서 말하는 시장 변화가 4차 산업혁명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코틀러의 마켓 1,2,3은 이 산업혁명과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숫자로 사람들의 인지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필립 코틀러의 책 원제에서는 1부의 제목이 ‘FUNDAMENTAL TRENDS SHAPING MARKETING’ 이라고 되어 있지만 한글 번역판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변화시킨 새로운 마켓 트렌드’ 라고 되어 있다. 원문에는 있지도 않은 4차 산업혁명을 굳이 끼워넣은 것이다.

나는 클라우스 슈밥의 4차산업혁명이 왜 하필 4차인지에 대해 고민할 때(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분류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에 4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물결’과 ‘산업혁명’은 분명 다르지만 사람들은 이를 연장선상에서 인식한다. 실제로, 제 3의 물결 다음에 오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오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 개념이 최대로 성공한다면 언젠가 경영학이나 마케팅 교과서 한 귀퉁이에서 ‘클라우스 슈밥의 산업혁명 세대 구분’ 이라는 내용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능성은 낮아보이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왜 특히 우리나라에서만 이 개념이 각광받는 것일까? 슈밥이 우리나라에 해준 것도 없는데.

국가 경쟁력 순위에 대한 높은 수요로 인해 타국에 비해 세계경제포럼의 인지도가 높은 점과 함께 아젠다 형성, 비전제시를 통한 언론과 출판사의 영업 욕구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사니의 커리어에 대한 단상

존 하사니에 대한 전기적 article을 읽었다.

IDEOLOGICAL PROFILES OF THE ECONOMICS LAUREATES 라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대상으로 한 짧은 페이퍼 묶음인데, 정치적 견해 및 트리비아가 주가 되는 흥미로운 페이퍼이다. 짧다고 해도 무려 71명에 해당하는 내용인만큼 전체 분량은 많기 때문에 짬날때마다 흥미가 가는 사람 위주로 읽고 있다.

하사니는 1920년 헝가리 태생으로 출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당히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은 삶을 살았다. 그는 2차세계대전 당시 군사 징집을 피하기 위해 약학을 전공하였지만 1944년 결국 노동지원으로 징집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치의 수용소를 피해 예수교 사제가 소개해 준 지하 피난실로 도망칠 수 있었다.

2차대전 이후 하사니는 부다페스트 대학으로 돌아가 1947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스탈린의 지배가 가시화되고 공산주의가 자리잡게 됨에 따라 사상적 문제로 강사직을 잃고, 자신의 학생이자 이후 아내가 된 앤 클라우버와 함께 헝가리를 떠나게 된다. (앤 클라우버는 이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1950년 고국을 떠나 시드니에 도착한 하사니는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받은 약학, 철학 학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영어 또한 못하는 하사니를 받아줄 직장은 없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하며 틈틈히 야간 수업을 들어 마침내 1953년 시드니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헝가리 태생의 약학부 출신 젊은 철학 교수가 전쟁을 경험한 뒤 사상 문제로 망명, 공장에서 일하며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새로운 학문인 경제학을 전공한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두드러지는 삶의 질곡을 느낄 수 있다.

이후 하사니는 1956년 록펠러 장학금을 받아 스탠포드 대학으로 진학, 지도교수인 케네스 애로우를 만난다. 그리고 그 때서야 수학과 통계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하사니 삶의 어려움은 끝나지 않아 심지어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비자 문제로 미국을 떠나게 된다. 시드니로 돌아갔다가 애로우와 토빈의 보증으로 겨우 다시 미국에 돌아오게 되고, 대학을 옮겨 마침내 버클리에서 교수로 자신의 커리어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하사니의 인생 궤적을 보면 전쟁과 정치적 상황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고 비틀리게 할 수 있는지가 잘 드러나 흥미롭다. 또한, 영어를 잘 못하는 비전공자 출신의 학자가 경제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은 드문 예로서 시사하는 바 또한 크다할 것이다. 특히, 사상적 문제로 호주로 도피해 언어적 문제와 함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장에서 일하며 새로운 학문을 시작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가히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존재라 하겠다.

달리 생각하면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늦게 시작한 학문이 만개한 것은 역시 그의 타고난 재능 탓일수도 있겠다. 하사니가 지도교수인 애로우의 영향을 받아 투표 및 후생, 효용 이론 연구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나 결국 그가 노벨상을 받은 주제는 게임이론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매우 흥미로운 뒷이야기 하나는, 하사니가 다닌 루터교 김나지움이 바로 게임이론의 창시자인 폰 노이만이 다녔던 학교라는 것이다. 게임이론에 공헌한 두 천재가 같은 곳을 지나쳤다는 것이 운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실은 이 학교가 부다페스트 최고의 명문학교였기 때문에…

초년의 불행 끝에 하사니는 자신의 응용 게임 이론이 사회 조직의 도덕적 분석에도 사용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념 문제로 고국을 떠나 수십년간 고생한 끝에 자신의 이론이 널리 인정받게 되고 이념의 승리에도 일조하였다. 또 직접 공산주의 종말을 목격하였으니 하사니의 삶은 완결성이 있고 전기적 관점에서도 아름답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스스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사실 재능을 가진 사람이 불행을 딛고 노력해 성공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멋지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