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사니의 커리어에 대한 단상

존 하사니에 대한 전기적 article을 읽었다.

IDEOLOGICAL PROFILES OF THE ECONOMICS LAUREATES 라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대상으로 한 짧은 페이퍼 묶음인데, 정치적 견해 및 트리비아가 주가 되는 흥미로운 페이퍼이다. 짧다고 해도 무려 71명에 해당하는 내용인만큼 전체 분량은 많기 때문에 짬날때마다 흥미가 가는 사람 위주로 읽고 있다.

하사니는 1920년 헝가리 태생으로 출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당히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은 삶을 살았다. 그는 2차세계대전 당시 군사 징집을 피하기 위해 약학을 전공하였지만 1944년 결국 노동지원으로 징집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치의 수용소를 피해 예수교 사제가 소개해 준 지하 피난실로 도망칠 수 있었다.

2차대전 이후 하사니는 부다페스트 대학으로 돌아가 1947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스탈린의 지배가 가시화되고 공산주의가 자리잡게 됨에 따라 사상적 문제로 강사직을 잃고, 자신의 학생이자 이후 아내가 된 앤 클라우버와 함께 헝가리를 떠나게 된다. (앤 클라우버는 이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1950년 고국을 떠나 시드니에 도착한 하사니는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받은 약학, 철학 학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영어 또한 못하는 하사니를 받아줄 직장은 없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하며 틈틈히 야간 수업을 들어 마침내 1953년 시드니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헝가리 태생의 약학부 출신 젊은 철학 교수가 전쟁을 경험한 뒤 사상 문제로 망명, 공장에서 일하며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새로운 학문인 경제학을 전공한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두드러지는 삶의 질곡을 느낄 수 있다.

이후 하사니는 1956년 록펠러 장학금을 받아 스탠포드 대학으로 진학, 지도교수인 케네스 애로우를 만난다. 그리고 그 때서야 수학과 통계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하사니 삶의 어려움은 끝나지 않아 심지어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비자 문제로 미국을 떠나게 된다. 시드니로 돌아갔다가 애로우와 토빈의 보증으로 겨우 다시 미국에 돌아오게 되고, 대학을 옮겨 마침내 버클리에서 교수로 자신의 커리어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하사니의 인생 궤적을 보면 전쟁과 정치적 상황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고 비틀리게 할 수 있는지가 잘 드러나 흥미롭다. 또한, 영어를 잘 못하는 비전공자 출신의 학자가 경제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은 드문 예로서 시사하는 바 또한 크다할 것이다. 특히, 사상적 문제로 호주로 도피해 언어적 문제와 함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장에서 일하며 새로운 학문을 시작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가히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존재라 하겠다.

달리 생각하면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늦게 시작한 학문이 만개한 것은 역시 그의 타고난 재능 탓일수도 있겠다. 하사니가 지도교수인 애로우의 영향을 받아 투표 및 후생, 효용 이론 연구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나 결국 그가 노벨상을 받은 주제는 게임이론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매우 흥미로운 뒷이야기 하나는, 하사니가 다닌 루터교 김나지움이 바로 게임이론의 창시자인 폰 노이만이 다녔던 학교라는 것이다. 게임이론에 공헌한 두 천재가 같은 곳을 지나쳤다는 것이 운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실은 이 학교가 부다페스트 최고의 명문학교였기 때문에…

초년의 불행 끝에 하사니는 자신의 응용 게임 이론이 사회 조직의 도덕적 분석에도 사용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념 문제로 고국을 떠나 수십년간 고생한 끝에 자신의 이론이 널리 인정받게 되고 이념의 승리에도 일조하였다. 또 직접 공산주의 종말을 목격하였으니 하사니의 삶은 완결성이 있고 전기적 관점에서도 아름답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스스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사실 재능을 가진 사람이 불행을 딛고 노력해 성공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멋지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