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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 재화에 대한 단상

오랜 기간 광고업계에 종사해 제일기획 부사장까지 지냈던 최인아 씨는 책방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고 있는데 이번에는 서점의 도서관화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특별히 새로운 주장은 없지만 ‘책방은 도서관이 아니다’ 라는 입장을 잘 나타낸 간결한 글이다.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주제인만큼 지겨운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도서정책에 대해서는 항상 여러 이견이 존재하는만큼 책이라는 재화 자체에 대해 한 번 살펴보자. 어떤 정책의 당위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화의 특징에 대해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책은 예로부터 마음의 양식, 지식의 보고 등으로 불리며 장려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져왔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긍정적 외부효과를 불러오는 재화라고 볼 수 있다. 의료백신 등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백신은 본인이 병에 걸리는 것도 막아주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백신이 보급된다면 백신을 접종받지 않은 사람도 병을 피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구매하는 개인이 얻는 효용 외에 부가적인 가치를 사회적으로 창출한다면 그것이 긍정적 외부효과이다.

책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책, 지식의 융성이 사회 전체적 인적 자본 축적에 기여한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공공도서관이 많이 존재하는 것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책이 가지는 긍정적 외부효과에 기인한다.

 

또 한 가지 고려할 특징은 책이 경험재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경험재는 탐색재와 함께 살펴보자. 탐색재는 구입 시 잠깐 살펴보는 것으로 가치를 알 수 있는 물건이다. 탐색에 걸리는 시간의 차이 및 정확도 등 경계는 다소 모호할 수 있으나 구입 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재는 구입하고 사용한 뒤에야 가치를 알 수 있는 물건이다. 주로 중고차나 1회성의 공연 등을 사례로 든다.

책은 둘의 사이에 있지만 경험재에 가깝지 않나싶다. 강연, 공연, 영화 등과 그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험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잠재적 구매자들에게 신호(signal)를 보낸다. 브랜드 가치나 명성,광고 등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비자들은 기업이 합리적이므로 신뢰를 잃고싶지 않다면 그간 쌓아온 브랜드 가치에 걸맞는, 쏟은 광고비에 걸맞는 제품을 내놓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물건을 구입하고 기업 또한 실제로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책과 가장 흡사한 영화/공연 등의 콘텐츠는 티저 영상이나 소개 팸플릿을 제작하거나 주연배우, 감독 등을 내세워 광고를 한다. 따라붙는 평론가들과 사전 시사회 방청자들의 평은 덤이다. 책보다 더 재화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수 밖에 없는 영화 및 공연 등의 콘텐츠가 이런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물론 책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상대적으로 영화나 공연에 비해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다. 또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의 수도 영화감독, 배우, 공연 기술자 등에 비해 무척 많다. 이렇듯 쉬운 제작 때문에 너무 많은 종류의 책이 존재하기 때문에 마케팅을 통한 차별화가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별도의 체험판을 제공하거나 부가적 정보를 만들어내기보다는 간단하게 넘겨봄으로써 확인하게 하는 전시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 조합의 결과는 어떤가? 책은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장려되어야 한다는 논지와 더불어 구매 이전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야 판매하기 쉽다는 논리가 결합되어 판매와 체험이 너무나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읽을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면 문화적 저변이 형성되어 책의 판매가 늘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나이브한 이야기이다. 직접적인 데이터상의 상관관계도 뒷받침되지 않거니와 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서 기회의 장려는 기업이 나서서 할 일이 아니다. 외부효과로 인한 시장실패는 정부가 교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이미 운영되고 있는 공공도서관에 대한 홍보 등으로 대체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대형 서점이 독서 기회를 장려하며 고통은 출판사에도 전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네 서점은 더욱 위축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야말로 생색은 대형서점이 내고 부담은 다른 쪽이 나눠 지는 형국이다.

 

책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현상은 단순히 책에 대한 탐색 기회를 높이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개별 개인의 책에 대한 선호가 떨어지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어떤 산업도 도서 산업과 같은 정책을 펴지 않는다. 탐색 및 체험 기회를 늘리는 것은 먼저 소비자의 필요에 따른 상품을 제작하고 이를 알리고자 할 때나 유효한 전략이다. 먼저 책은 도서관에서 보거나 콘텐츠 제작자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기 위해 구입해서 보아야 한다는 인식을 주어야 한다. 오히려 책에 대한 체험의 기회를 줄이고 전문가 서평이나 도서판 로튼토마토와 같은 유저 리뷰 사이트 등의 정보 제공 채널을 늘리는 편이 올바른 접근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도서 정가제 등 인센티브 구조를 외면한 탁상행정식 정책이 사라지고, 다양한 가격 정책과 e-book 등 새로운 유통 플랫폼의 활성화를 시도하게 해야 한다. 책의 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실물 책에 대한 체험 기회가 적기 때문이 아니다. 문자를 이미지와 영상이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재생 난이도가 높은 동영상마저도 온라인, 모바일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이다. 아무리 서점에서 책을 제공하더라도 항상 쥐고 있는 휴대폰보다 접근성이 높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잡지나 신문 등 구독 활자 매체들은 기존 인쇄매체와 인터넷판을 결합하여 판매하고 있다. 책을 구입할 때 e-book과 번들링한 버전을 선택할 수 있는 등 근본적인 제품의 특질 변화를 자유롭게 시도하게 해야 한다. 단순한 체험 기회의 증대로는 수요를 변화시킬 수 없음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서점이 살아야 출판사가 사는 것이 아니며, 출판사가 양질의 책을 만들어내야 유통상인 서점이 득을 보는 것이다. 휴대폰 제조사가 휴대폰을 잘 만들어야 유통 대리점들이 많은 수익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책은 반대로 되어 있다. 체험 기회를 주다가 대량의 리퍼폰을 제조사에 떠넘겨 부담을 주고 원가 절감 압력을 통해 질을 떨어뜨리는 상황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품질이 떨어진 책들조차 – 접힌 부분이 생기거나 약간의 손 때가 묻은 책들 – 할인판매할 수 없게 막아둔 도서정가제이다. 악성재고를 만들게 하고 덤핑조차 못하게 한다.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없는데 판촉행사만 많이 한다고 물건이 잘 팔릴 리가 없겠다.

대형서점의 역할이 줄어들고 저자, 출판사와 정부가 협력해야 한다. 책의 긍정적 외부효과에 주목해 도서관에 들어가는 책과 e-book에도 인센티브가 생기는 제도 등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만이 책이라는 재화의 본질에 역행하지 않고 독자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산업을 유지하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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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은 세금을 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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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는 쿼츠와의 인터뷰에서 인간을 대체하는 로봇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세금을 냅니다. 기계는 세금을 내지 않죠. 그런데 로봇은 인간을 대체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기존의 기계와 달리 로봇(휴머노이드를 떠올려봅시다)들은 세금을 내는게 옳은 것 아닐까요?

게이츠의 주장은 정확히는 공장 자동화에 대해 세금을 물려 세원을 확보하고 그 재원을 이용해 사람이 좀 더 우월한 영역, 이를테면 노인이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이러한 세금을 물리게 되면 공장의 자동화는 늦춰지게 됩니다. 기업은 한계적으로 의사결정하고 세금을 내야 한다면 로봇의 가치는 작아질테니까요. 그리고 빌 게이츠는 이 ‘자동화 감속’에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득분배에 대해 이야기하며 기업이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정부가 나서야 함을 다시 한 번 역설하고 있습니다.

아마 게이츠의 주장은 불평등 문제나 산업구조의 변경으로 발생하는 많은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재원을 기존의 방법으로 마련하기 어려우므로 아직 이해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 파레토 효율의 개념을 연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 영역에서 재원을 마련하자는 현실적 문제와 결부되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잘 알려진 마술같은 개념적 트릭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게이츠의 원문 주장에 깔려있는 경제학적 근거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 시대 최고의 혁신을 이끈 기업가가 혁신의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말할 때는 비단 분배 목적의 구호뿐 아니라 나름의 통찰이 있을 것입니다.

Tyler Cowen은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외부효과라고 말합니다. 가장 먼저 고려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인간에 대한 돌봄이 증가하게 된다면 이는 낮은 기계대체율로 인한 비효율을 커버할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책이나 교육, 백신 서비스가 대표적입니다. 이들 긍정적 외부효과를 가진 재화들은 흔히 시장에서 사회 최적 수준으로 공급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나서 낮은 가격에 교육, 백신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로봇을 인간의 노동으로 대체하는 대신 천연자원 등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는 혁신만 늦추고 실제 긍정적인 고용효과나 일자리 창출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로봇에 세금을 매겨 혁신을 포기하는 대가로 기업이 추구하지 않는 국가 전체의 ‘인간의 행복’ 을 원했는데, 로봇에서 도피하여 다른 곳에 도착한다면 기업의 최적 선택만 방해한 꼴입니다.

결과는 로봇, 인간노동, 다른 대체 생산요소의 탄력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로봇에 대한 탄력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효과도 뛰어날 것입니다.

실증 결과는 어떨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기계의 생산성이 올라가고 대체되어왔음을 상기해야합니다. 결국 로봇은 필수적인 자본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로봇에 대한 수요 탄력성은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도 기계와 사무 자동화 기기는 수없이 등장해왔습니다. 로봇만이 특별취급 받아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모든 경제주체는 한계적으로 생산합니다. 오래동안 이어져온 노동-자본의 7:3 내지는 6:4 비율 생산 기여가 깨지게 될 때 부의 격차는 커지게 되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 과세 구조를 급격하게 변경하는 것은 생산 위축을 가져와 조세의 총 수입량 자체를 줄여버리는 ‘하향 평준화’를 낳을 수 있습니다.

외부효과에 대한 고민은 실증적(emprical)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로봇을 새로운 조세 영역으로 선제적 확보, ‘인간 특화형’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생산요소의 효율성 관점에서도 마찰적 실업의 기간을 줄여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동통신시장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정부가 기존에는 사용하지 않던 주파수를 천연자원으로 규정, 판매해 연간 수조 원의 세입을 확보한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여기까지 온다면 질문을 논의를 축약한 하나의 아이러니컬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봇은 인류 앞에 내려온 새로운[우리 모두가 누리는] 자원에 가까울까요? 아니면 기존의 노동을 대체하는 자본재에 불과할까요?

핵심은 의외로 철학적 문답이 아니라 로봇이 가지는 실증적인 노동 대체율일지도 모릅니다.

4차산업혁명은 계속 사용될 용어인가

최근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여러 매체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비단 언론사뿐 아니라 유력한 대통령후보들마저 연설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으니 적어도 한국에서는 꽤나 자리잡은 용어로 보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기실 이 용어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잘 쓰이지 않으며 세계적으로는 더욱 생소한 용어이다. (독일 정도만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차산업혁명은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 의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이 밀고 있는 용어이다. 위의 링크에 가보면 현재 등장하는 각종 융복합 산업의 등장, 스마트 팩토리 등을 4차산업혁명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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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세계경제포럼은 증기기관과 기계 생산의 등장, 분업과 전기/대량생산, 전자/IT 분야의 등장을 이전까지 1,2,3세대 산업혁명으로 정의하고 현재 4세대 산업혁명이 등장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당 글은 2015년 9월에 나왔고, WEF에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지 1년이 조금 지난 셈이다. 아직 해당 용어가 많이 퍼지지는 않았다. 구글에 검색해보면 WEF와 클라우스 슈밥이 언급한 것만 줄창 나온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사이비 유행어인가?

일단 세계경제포럼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보자.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각종 보고서를 쓸 때 국가별 순위를 매기고 싶다면 이 곳의 자료를 안 볼 수가 없다. 각종 국가 경쟁력 지수는 대부분 여기서 만든다. 소위 ‘다보스 포럼’이 바로 이 세계경제포럼이다. 나름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어느정도 유명세와 함께 아젠다를 형성하는 권위는 가진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포럼의 회장인 클라우스 슈밥은? 클라우스 슈밥이라는 사람은 1938년생인데 1971년부터 세계경제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다. 33세에 창립해서 지금까지 계속 회장이다. 슈밥은 스위스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케네디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유럽의 국가들이 미국의 혁신을 따라잡자는 취지로 만든 단체가 세계경제포럼인데 벌써 50년이 다 되어간다. 슈밥은 제네바 대학교의 교수직도 맡아왔지만 딱히 다른 학문적 성과는 없고 세계경제포럼의 운영에 주력해왔다.

그래서 이번에 하나 밀어보려고 하는게 이 4차산업혁명인 것 같다. 사실 산업혁명이면 산업혁명이고 제 3의 물결이면 토플러의 물결이론이지 기존에 산업혁명의 차수를 딱히 나눠오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마 그래서 해외서도 큰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명 경제사학 블로그 중 하나인 Capitalism’s Cradle 에 따르면 이러한 산업혁명 분류는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대표적인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아래와 같다.

  1. 증기기관을 첫 번째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너무 좁게 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과 기계화를 함께 언급해 1세대를 구성한다면 세대를 보는데는 낫지만, 그렇다면 그 시작을 1784년으로 하는것보다 수십년을 당겨야 합니다.
  2. 산업혁명은 ‘발명’의 발명입니다. 그러므로 몇 가지 기술에만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분업과 같은 개념을 2기에 넣는 것은 애매합니다. 애덤 스미스도 1기의 시기에 분업을 언급했고, 포드 스타일 조립 라인이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은 맞지만 분업 개념은 몇몇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ies;GPT)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Anton Howes 는 산업혁명에 대해 두 가지 설명을 제안한다. 아예 이를 나누지 않고 지속되는 혁신으로 정의하거나, 좀 더 엄밀하게 범용기술에 의해서만 분류하자는 것이다. 굳이 범용 기술 묶음을 이용해 시기 분류를 하자면 이번 융합 혁명은 6차 혁명이라는 분류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현재 언론 해외에서도 별 반향이 없고(일례로 유명언론들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구글에서 4th industrial revolution으로 검색했을 때 단 하나 걸리는 이코노미스트의 2012년 기사에 따르면 오히려 지금 오는 변화가 3차 산업혁명이라고 주장한다), 학문적인 기반 또한 약해보이는 이 단어는 그냥 사라져버릴 것인가?

세계경제포럼에서 만든 4차산업혁명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의 좋아요 수는 수십 개에 불과하며 언론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슈밥이 경제학 박사 학위가 있어서 경제학자라고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기실 슈밥은 대학에서도 기업이론을 강의해왔고 세계경제포럼의 아젠다 설정 또한 경영학 영역에 걸쳐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애초에 세계경제포럼의 전신부터가 미국의 사례를 따라잡기 위한 유럽 경영인들의 모임인 ‘유럽경영포럼(European Management Forum)’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마케팅 학자인 필립 코틀러가 낸 최근 책 마켓 4.0이 죽어가는 4차 산업혁명 개념에 호흡기를 달아줄 것 같다. 마켓 4.0에서 말하는 시장 변화가 4차 산업혁명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코틀러의 마켓 1,2,3은 이 산업혁명과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숫자로 사람들의 인지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필립 코틀러의 책 원제에서는 1부의 제목이 ‘FUNDAMENTAL TRENDS SHAPING MARKETING’ 이라고 되어 있지만 한글 번역판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변화시킨 새로운 마켓 트렌드’ 라고 되어 있다. 원문에는 있지도 않은 4차 산업혁명을 굳이 끼워넣은 것이다.

나는 클라우스 슈밥의 4차산업혁명이 왜 하필 4차인지에 대해 고민할 때(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분류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에 4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물결’과 ‘산업혁명’은 분명 다르지만 사람들은 이를 연장선상에서 인식한다. 실제로, 제 3의 물결 다음에 오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오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 개념이 최대로 성공한다면 언젠가 경영학이나 마케팅 교과서 한 귀퉁이에서 ‘클라우스 슈밥의 산업혁명 세대 구분’ 이라는 내용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능성은 낮아보이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왜 특히 우리나라에서만 이 개념이 각광받는 것일까? 슈밥이 우리나라에 해준 것도 없는데.

국가 경쟁력 순위에 대한 높은 수요로 인해 타국에 비해 세계경제포럼의 인지도가 높은 점과 함께 아젠다 형성, 비전제시를 통한 언론과 출판사의 영업 욕구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사니의 커리어에 대한 단상

존 하사니에 대한 전기적 article을 읽었다.

IDEOLOGICAL PROFILES OF THE ECONOMICS LAUREATES 라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대상으로 한 짧은 페이퍼 묶음인데, 정치적 견해 및 트리비아가 주가 되는 흥미로운 페이퍼이다. 짧다고 해도 무려 71명에 해당하는 내용인만큼 전체 분량은 많기 때문에 짬날때마다 흥미가 가는 사람 위주로 읽고 있다.

하사니는 1920년 헝가리 태생으로 출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당히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은 삶을 살았다. 그는 2차세계대전 당시 군사 징집을 피하기 위해 약학을 전공하였지만 1944년 결국 노동지원으로 징집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치의 수용소를 피해 예수교 사제가 소개해 준 지하 피난실로 도망칠 수 있었다.

2차대전 이후 하사니는 부다페스트 대학으로 돌아가 1947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스탈린의 지배가 가시화되고 공산주의가 자리잡게 됨에 따라 사상적 문제로 강사직을 잃고, 자신의 학생이자 이후 아내가 된 앤 클라우버와 함께 헝가리를 떠나게 된다. (앤 클라우버는 이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1950년 고국을 떠나 시드니에 도착한 하사니는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받은 약학, 철학 학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영어 또한 못하는 하사니를 받아줄 직장은 없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하며 틈틈히 야간 수업을 들어 마침내 1953년 시드니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헝가리 태생의 약학부 출신 젊은 철학 교수가 전쟁을 경험한 뒤 사상 문제로 망명, 공장에서 일하며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새로운 학문인 경제학을 전공한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두드러지는 삶의 질곡을 느낄 수 있다.

이후 하사니는 1956년 록펠러 장학금을 받아 스탠포드 대학으로 진학, 지도교수인 케네스 애로우를 만난다. 그리고 그 때서야 수학과 통계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하사니 삶의 어려움은 끝나지 않아 심지어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비자 문제로 미국을 떠나게 된다. 시드니로 돌아갔다가 애로우와 토빈의 보증으로 겨우 다시 미국에 돌아오게 되고, 대학을 옮겨 마침내 버클리에서 교수로 자신의 커리어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하사니의 인생 궤적을 보면 전쟁과 정치적 상황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고 비틀리게 할 수 있는지가 잘 드러나 흥미롭다. 또한, 영어를 잘 못하는 비전공자 출신의 학자가 경제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은 드문 예로서 시사하는 바 또한 크다할 것이다. 특히, 사상적 문제로 호주로 도피해 언어적 문제와 함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장에서 일하며 새로운 학문을 시작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가히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존재라 하겠다.

달리 생각하면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늦게 시작한 학문이 만개한 것은 역시 그의 타고난 재능 탓일수도 있겠다. 하사니가 지도교수인 애로우의 영향을 받아 투표 및 후생, 효용 이론 연구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나 결국 그가 노벨상을 받은 주제는 게임이론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매우 흥미로운 뒷이야기 하나는, 하사니가 다닌 루터교 김나지움이 바로 게임이론의 창시자인 폰 노이만이 다녔던 학교라는 것이다. 게임이론에 공헌한 두 천재가 같은 곳을 지나쳤다는 것이 운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실은 이 학교가 부다페스트 최고의 명문학교였기 때문에…

초년의 불행 끝에 하사니는 자신의 응용 게임 이론이 사회 조직의 도덕적 분석에도 사용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념 문제로 고국을 떠나 수십년간 고생한 끝에 자신의 이론이 널리 인정받게 되고 이념의 승리에도 일조하였다. 또 직접 공산주의 종말을 목격하였으니 하사니의 삶은 완결성이 있고 전기적 관점에서도 아름답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스스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사실 재능을 가진 사람이 불행을 딛고 노력해 성공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멋지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