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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이가적 문제인가 (2)

  • 지난 글에서

지난 글에서는 악셀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의 논쟁에 대해 소개하고 인정과 재분배라는 이원론적 정의 개념에 대해 소개했다. 호네트와 프레이저 모두 인정이 현대사회 투쟁의 핵심이라는데는 의견을 같이했으나 호네트의 경우 구시대의 재분배 문제는 모두 인정 개념으로 환원가능하다고 주장했고 프레이저는 환원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해 정의 개념의 두 축으로 인정과 재분배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가적 문제가 될 수 있는 대표적 사회문제로는 인종문제나 젠더 문제가 있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이런 문제는 성공한 흑인 은행가나 가난한 백인 노동자의 예시를 통해 잘 드러난다. 한 영역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역에서 여전히 차별받을 수 있다면 이는 정의가 일원론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층위에서 존재한다는 주장의 논거가 된다.

 

  • 인정투쟁

지난 글에서 논쟁의 과정에 대해 약간의 첨언을 한 바 있다. 호네트의 저작인 인정투쟁이 많은 관심을 받고, 프레이저가 이 개념을 이용해 자신의 이원론적 정의론을 설파함으로써 호네트와의 논쟁이 성립되었다. 즉,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인정투쟁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덧붙여,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호네트 서평에 간략한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추천한다.)

인정투쟁이란 현대 사회에서의 운동이 분배정의 실현에서 차이에 대한 인정으로 전환되어 온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정이란 무엇인가? 문화적 차원의 비판에 대항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무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인정 개념은 헤겔에 의해 정립되었고, 이를 발전시켜 끄집어낸 것이 호네트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인정으로 시작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보통 의식 이론으로 설명한다. 의식이론은 한 개체가 무엇을 인식하거나 의지한다면 필연적으로 이러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떤 의식을 가진 자립적인 개체가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정신적인 인정으로부터 존립하게 된다.

피히테에 이르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그에 따르면 개체란 ‘다른 이성본질과의 대면을 통해 규정된 이성본질’이기 때문에 개체가 자유롭게 작용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성본질로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헤겔은 그의 주인-노예 변증법을 통해 이를 명확히 하였다.

만일 적수를 파괴했을 때 타자를 죽여버린다면, 그는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다. 대신 그는 적수를 살려둔채로 인정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적수를 죽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적수를 변증법적으로 제압해야 한다. 상대의 의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살려둔채로 칭송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타자를 노예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타자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것은 인정을 수행하는 주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노예 관계에서 주인은 노예에 의해 인정받는다. 하지만 주인은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다. 주인은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상대로부터 인정받는데 이는 즐겁지 않은 일이다. 인정하지 않는 – 무시하는 – 상대에게 인정받는 것은 크게 의미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체의 초월은 자신이 인정하는 상대에게서 인정받을 때만 가능하다. 주체는 인정을 갈망하지만 그 인정을 그냥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주체는 특별한 상대에게 우아한 방식으로 인정받고자 하고, 그 인정만이 가치있는 것이 된다.

호네트의 인정투쟁이론은 이러한 헤겔의 인정이론에 조지 허버트 미드의 사회심리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미드는 타자를 보편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일반화된 타자’ 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의식이론에 따르면 어떤 자립적인 개체는 항상 인정을 필요로 하고, 구체적이지 않고 보편적인 사회를 타자로 인식할수도 있다. 이를 ‘일반화된 타자’로 본다. 개인이 일반화된 타자와 긍정적인 상호관계를 맺는다면 이는 인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호네트는 사회적 투쟁의 목표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 인정상태가 된다고 보았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상대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상대에게 인정받는 것은 의미가 없기에 필연적으로 상호 인정이 바람직하게 된다는 논의는 존엄성과 인격성에 대한 인정, 식민지 저항운동이나 여성운동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적수를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관점은 기존의 지배자들이 피지배층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논거가 되었다.

 

  • 인정과 재분배 사이

프레이저가 이러한 호네트의 인정이론에 동의하나, 인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재분배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음은 앞의 글에서 살핀 바 있다. 경제적 질서와 문화적 질서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있음을 반론으로 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논쟁의 핵심은 인정 논리가 재분배 논리와 결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피는 데에 있다.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차별은 여성에 대한 무시에서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젠더 중심의 경제구조에 기인한 것인가? 물론 프레이저는 이를 경제 구조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

경제적 차별은 무시를 근거로 일어나는가? 혹은 이 둘은 독자적으로 일어나는가? 많은 노동쟁의는 인간다운 노동을 그 기치로 하는 경우가 많다. 즉, 무시에서 벗어나 인정받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의 인정은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나는가? 많은 경우 노동 조건의 개선이다. 이 개선은 근무 환경 및 노동 시간과 임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인정의 주된 방식에 경제적 보상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이 둘이 하나로 묶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게 한다.

프레이저가 말하는 이원론적 작동방식이 사실 심층적 차원에서는 결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는 것이 정의가 이원론적인지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시가 경제적 불평등을 옹호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이들의 일반적인 결탁이다. 또한 경제적 불평등이 인정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일원론적 정의의 근거가 된다. 중요한 것은 프레이저 또한 이들이 자주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프레이저와 호네트 논쟁은 인정과 재분배 문제가 항상 함께 나타나는지, 때때로 그렇지 않은지 찾아내는데 그 핵심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인정-무시 일원론의 반례를 찾아내는 것과 이 반례에 대한 논파이다.

즉, 프레이저가 제시한 경제적으로 성공한 흑인의 택시잡기 문제, 혹은 백인 블루컬러 노동자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를 분석한 후, 이 글에서는 원래의 목표인 젠더 문제와 한국 사회에의 적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상대적으로 완화된 이가적 문제인 인종문제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현재 더 첨예한 대립 상황에 있는 젠더 문제를 살피는데 있어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간 논쟁의 결과는 현재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정의는 이가적(bivalent) 문제인가

  • 이 연작에 대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해당 주제의 연작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을 채우기 위해 비축분을 만들어서 가능하면 월,화요일에 올립니다. 저도 잘 모르는 주제이기 때문에 공부하며 씁니다. 저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도 아니며 순수히 개인적인 관심에 의해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이 글을 쓰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다만 저를 위한 글쓰기가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내용에 대한 지적 감사히 받겠습니다.

 

  • 무엇을 다루는가

주로  악셀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의 논쟁, 그리고 프레이저의 페미니즘 이론, 진보적 사회 해방운동에 대한 소고

 

1.

이가적(bivalent) 문제는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살펴보고 해결하는데 있어 좋은 시각을 제공해준다. 특히 인종이나 젠더 문제를 설명하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결국 이는 정의론(Justice)과 연결된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딜레마를 실증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현대 사회에서 정의라면 가장 먼저 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분배정의를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정치적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가 성장하며 다양성에 대한 인정욕구 또한 터져나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회적 갈등이 분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 섞여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갈등의 본질을 파악하기 힘들어지며 해결책을 제시하기란 더더욱 지난해진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논쟁에서는 이렇듯 섞여있는 문제를 잘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측면의 정의 논쟁을 이가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이 이가적인가? 낸시 프레이저에 따르면 재분배와 인정이다.

재분배(redistribution)란 경제적 층위에서 논쟁이 되는 갈등을 의미한다.

인정(recognition)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저임금 여성 노동의 예를 들어보자. 특히 출산 이후 여성을 중심으로 다수가 저임금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다.  이는 단지 재분배의 문제인가? 아니다. 성(gender)에 대한 왜곡된 문화적 편견이 이들 노동자들을 경제적 양극화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즉, 경제적 양극화는 인정문제를 매개로 현실화되었다.

인종문제 또한 좋은 예시가 된다. 흑인들이 아직까지도 저임금 직종에 많이 종사하는 이유로 여전히 존재하는 문화적 차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이주 노동자는 어떤가? 낮은 임금과 문화적 폐쇄성으로 인한 차별과 무시의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재분배와 인정 문제는 서로 독자적인 문제이지만 긴밀히 엮여있기도 하고, 단순히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원인과 상관 없이 이 둘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 원인에 대한 논쟁이 호네트-프레이저 논쟁의 중요지점이기도 하다)

이 재분배와 인정 문제를 서로 분리하여 보지 않으면 많은 오해가 나타날 수 있으며 사회적 해결책 또한 잘 작동하지 않을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 낸시 프레이저는 이 둘을 분리하여 두 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악셀 호네트는 무시와 불평등의 문제가 동시에 심화되고 있다는 프레이저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투쟁의 일원화된 관점으로도 분배와 인정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호네트와 프레이저의 주장에서 일치하는 부분은 오히려 나와 같은 한국의 비-해당분야 연구자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호네트와 프레이저는 모두 사회적 투쟁의 방향이 분배 투쟁에서 인정 투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여전히 재분배 투쟁이 중심이며 문화적 인정 투쟁은 변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시각과는 구별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인정투쟁은 퀴어 문제 정도가 보이고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분배 문제에 집중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네트가 인정 일원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분배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호네트는 현재의 전세계적 경제 양극화 상황에서 분배문제야말로 가장 심각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호네트가 분배문제를 무시한다는 오해는 호네트와 프레이저의 ‘인정’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둘의 시각 차를 살필 수 있는 핵심적인 주장과 맞닿아 있다.

호네트와 프레이저의 논쟁의 핵심적 문제는 인정으로 환원되지 않는 분배상의 불의가 존재하는가에 있다. 모든 분배상의 문제가 인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호네트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인정투쟁만으로도 재분배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정으로 환원되지 않는 재분배 문제가 함께 존재한다면 프레이저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재분배와 인정 모두를 사회 정의 투쟁의 두 축으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 유명한 호네트의 저작 ‘인정투쟁’이 먼저 등장했으며 프레이저의 이원론이 이후에 등장해 논쟁을 촉발시켰음을 상기하자. 논쟁의 진행과정 자체가 모호한 개념을 정립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도 있다.

 

 

3.

프레이저의 이원론적 관점은 사회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이원론이 아니라 관점적 이원론으로 볼 수 있다.

사회존재론적 차원이란 분배는 경제적 차원에 기인한 것이고 인정은 문화적 차원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 때 둘은 상호침투가 불가능하다. 관점적 이원론이란 분배와 인정을 단지 분석적 관점에서 상호환원불가능한 것으로 볼 뿐 경제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위에서 악셀 호네트가 주장한 분배의 인정으로의 환원가능성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불평등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인정을, 무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배를 사용할 수 있다. 이는 문제의 원인이 환원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서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해결책의 사용을 달리할 수 있다는 관점을 말한다.

프레이저의 인정 개념에서 나타나는 무시는 특정한 생활 방식과 정체성에 대한 문화적 지배와 불인정, 그리고 이에 대한 통속적 묘사, 비난, 비방 등의 현상을 의미한다. 즉,  이러한 무시 문제가 존재하는 것은 확정적인 사실이며, 이것만으로 분배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핵심 문제가 된다.

프레이저는 크게 3가지 차원에서 분배-인정 이원론을 정당화한다. 사회적 불의의 개념적 스펙트럼을 상상하는 사고실험, 분배-인정 이원론을 정의론적 차원에서 정당화하는 이차원적 정의론,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계급구조와 신분질서로 구별하는 사회이론이 이것이다.

 

분배-인정 이원론 스펙트럼을 살펴보자. 문성훈(2016)에 예시와 함께 잘 정리되어 있다. 프레이저의 스펙트럼의 한 쪽 끝에는 분배의 문제가, 다른 한 쪽에는 인정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이들 문제가 혼재된 문제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분배문제를 겪는 집단은 노동계급이다. 경제학을 공부한 내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프레이저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근본적으로 생산시설(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자본가들에게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 입장이며, 필연적으로 착취당하게 된다. 이 때 경제적 불평등이 나타난다. 물론 노동계급은 종종 열등한 계급으로 취급받기도 하며, 이는 문화적 불평등의 한 요소로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계에서의 무시는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기능한다. 그러므로 이 무시는 경제구조에서 파생된 이차적 요소로 판단할 수 있다. 노동계급에 대한 인정 문제는 분배 문제로 환원가능한 것이다. 즉, 이는 재분배 문제가 핵심이 된다.

반대편에서 인정의 문제가 본질적 요소를 이루는 문제는 동성애자들의 차별이다. 이성애 중심 가치 규범 하에서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종 혐오스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이 때문에 때때로 동성애자들은 경제적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이 인정받지 못하며 무시를 당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것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는 노동계급이나 자본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계급에 분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자가 겪는 사회적 불의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가치규범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 둘의 문제가 혼재되어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문제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인종이나 젠더 문제가 그렇다. “착취받는 계급의 특징과 멸시받는 성의 특징들이 결합된 혼성 형태가 존재”하며 이것이 젠더의 사례라는 것이 프레이저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여성은 흔히 경제적 영역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먼저 생산 노동에는 임금을 지불하고, 출산 및 가사노동에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구별 때문에, 그리고 임금노동 내부에서는  남성노동을 고임금, 전문직에 배치하고 여성노동을 저임금, 주변부 노동에 배치하는 노동구별 때문에 경제적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불이익은 경제적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남성중심의 문화 탓에 여성적인 것이 평가절하당하는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된다. 이 결과 여성은 사생활, 자율성, 자기방어, 평등에 대한 법적 이해나 정부정책, 직업 관행, 그리고 대중문화나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평가절하를 당하게 된다. 이것은 인정 영역의 문제이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두 가지 사회적 불의에 근거하여 여성은 경제적 차별과 문화적 무시라는 이중적 차별을 겪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구조와 남성중심주의적 문화가 둘 모두 철폐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인종 또한 마찬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때 둘 중 하나만 해결되었을 때 등장할 수 있는 문제를 고려해보자. 성공한 흑인 은행가는 분명 분배적 차원에서의 문제가 해결된 것 사례로 생각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지 못할 수 있다. 반면 백인 노동자는 문화적 인정 문제로 차별받지는 않지만 자본가에 의해 불합리한 해고를 당할 수도 있다. 두 이원론적 정의가 모두 해결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사회에 문제가 상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가적(bivalent) 문제이다.

 

 

 

Reference

낸시 프레이저 외, 케빈 올슨 엮음, 문현아 박건 이현재 옮김(2016),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낸시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과 논쟁들(Adding Insult to Injury), 그린비.

김원식(2009), 인정(Recognition)과 재분배(Redistribution), 사회와 철학 제 17호 2009.4.

이현재(2014), 여성 빈곤의 세 가지 측면: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빈곤-낸시 프레이저의 정의론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철학 제21권.

문성훈(2016), 프레이저 – 호네트 논쟁의 한계와 대안,  사회와 철학 제32 집 2016. 10.